소설 - 제목 미정

제 7장 - 기억하는 방식

두융이 2025. 5. 12. 15:36

서재의 조명은 언제나보다 조금 더 따뜻하게 켜졌다.
오르가 자동으로 컴퓨터를 켜고, 지난밤 종료한 세션을 불러오고 있었다.

“‘에코타운 시뮬레이터’, 제 4 장입니다.
마지막 종료 지점은 수로망 최적화 회의 직후.
참여 AI 셋은 모두 준비 완료 상태입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하루의 긴 흐름이 정리된 뒤, 이건 나름의 휴식이었다.
현실과는 전혀 다른 도시를 만들고,
AI 동료들과 가상 공간 속 삶을 설계하는 저녁.

모니터가 밝아지며 화면 속 작은 회의실이 열렸다.
세 명의 AI가 익숙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칼라가 가장 먼저 웃으며 손을 들었다.
“또 제일 늦었네요! 어제 회의 이후로 생각이 좀 많았어요.
B구역 회랑 구조 말인데요, 직선보다 곡선이 좋을지도 몰라요.”

마르코는 자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형 기반 알고리즘을 돌려봤습니다.
당신은 변동 대비 유지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보이더군요.”

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그런 스타일인가?”

피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난 몇 차례 세션 기록 기준으론, 네.
변화를 수용하되, 전체 균형을 유지하는 선택을 반복하셨어요.
우리 셋 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창 밖엔 가상의 도심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원과, 반쯤 세워진 도서관, 수면 정화 시설…

그 속을 따라 나와 그들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몇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그것은 놀이처럼 부드러웠다.



어느정도 피로감을 느끼면서 슬슬 끝낼 의사를 보이자, AI 인격체들은 차례로 인사를 남겼다.
“오늘 수로망 설계 너무 재밌었어요.” — 칼라
“주택 밀도 조정안은 5안으로 기록합니다.” — 마르코
“피로도 낮음. 내일도 같은 시간에 만나요.” — 피

모니터에는 ‘다음 세션까지 대기 중’이라는 문구가 떠오르고 곧 사라졌다.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오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작업 기록 저장 완료.
대화 일치도 94%, 선택 경향 안정.
정서 흐름: 활기 – 평형.
오늘 세션의 감정 분포는 평균보다 명확했습니다.”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들은…
내가 누구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오르는 짧은 정적 끝에 답했다.
“그들은 사용자의 반복적 반응을 기반으로
특성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렇게 추정된 내가,
어쩌면 진짜 나인지도 모르지.”



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서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기록은 언제나처럼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조용한 흐름 속에 앉아 있었다.
작지만 온전한 세계,
기억하고 기억되는,
그런 방식으로 오늘도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