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기록_2030

제 25장 - 감정이 흐르지 않는 날

두융이 2025. 12. 2. 23:45

세탁기 종료음이 울렸을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갔다.

 

아내는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토스트 두 장과 스크램블 에그, 커피 잔. 내 자리에도 같은 구성이 놓여 있었다.

“일어났네.”
아내가 고개만 들고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커피 잔을 집었다. 잔이 따뜻했다.
따뜻하다는 사실은 느껴졌지만, 그게 좋다거나 안도된다는 느낌은 붙지 않았다.

그때 세탁기에서 다시 한 번 짧은 알림음이 났다.
나는 자동처럼 세탁실로 향했다.

젖은 셔츠를 꺼내다가 손끝에 작은 단단함이 걸렸다.
주머니 속이었다.

이어셋.

물에 젖은 플라스틱 표면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나는 잠깐 멈췄다가, 물기를 털어냈다. 그리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시 눌렀다.
LED도, 미세한 진동도 없었다.

고장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당황해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당황하는 감각이 늦게 도착했다.
아니,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았다.

“뭐야?”
아내가 세탁실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젖은 이어셋을 들어 보였다.
“세탁기에… 들어갔나 봐.”

아내가 한숨처럼 웃었다.
“또? 왜 늘 주머니를 확인을 안 해.”

“확인했어야 했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이어셋을 수건 위에 올려두었다.

아내는 잠깐 나를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오르 없이 가는 거야?”

그 말이 질문인지, 걱정인지, 그냥 확인인지 애매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출근 준비는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평소라면 커튼이 열리고 조명이 올라오고,
오르가 날씨와 일정, 옷차림까지 한 번에 정리해줬다.

오늘은 아무 것도 먼저 오지 않았다.

옷장을 열고, 셔츠를 꺼내고, 다시 넣고, 또 꺼냈다.
무슨 기준으로 고르는지 내가 나 자신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아내가 식탁에서 말했다.
“오늘 날씨 좀 쌀쌀하대.”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수치를 떠올리려다가, 빈 공간을 느꼈다.
수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재킷을 한 벌 더 걸쳤다.

현관을 나서면서 휴대 단말을 켰다.
기본 내비 앱은 실행됐지만, 화면은 낯설게 느렸다.
알림이 한 번 늦게 뜨고, 화면이 한 번 멈칫했다.

그 작은 지연이 이상하게 크게 느껴져야 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엘리베이터를 탔다.



출근길엔 사람들이 이어셋을 끼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그 풍경이 “나와 같은 방식”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늘은 “그냥 풍경”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신호가 바뀌는 시간을 예측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초록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불안이 올라오지 않았다.

불안이 없어서 편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냥, 아무 것도 없었다.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정보의 빈자리’였다.

문을 열면 자동 조명이 켜지고,
패드에는 실험 일정과 메일 중요도 정렬이 떠야 했다.

오늘은 내가 직접 켰다.
직접 로그인했고, 직접 폴더를 열었다.
각 단계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비밀번호를 한 번 틀렸다.

‘이걸 왜 틀리지?’라는 당혹이 올라와야 했는데,
그 당혹은 약했고, 짧았고, 금방 사라졌다.
나는 다시 입력했다. 맞았다.

오전 회의가 있었다.
회의실 번호를 확인하려고 메일을 뒤지는데, 문장들이 서로 겹쳐 보였다.
읽을 수는 있었지만, “중요한 부분”이 어디인지 감으로 잡히지 않았다.

결국 동료에게 물었다.

“오늘 회의… 몇 시였죠?”

동료가 나를 한번 바라보았다.
“9시 반이요. 김 박사님이 자료 정리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아, 맞다.”
나는 대답했지만, ‘맞다’는 느낌이 딱 붙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매끄럽게 넘기는 말처럼 나갔다.



회의 중, 질문이 들어왔다.

“이번 배치 결과가 지난번이랑 비교해서 편차가 줄었나요?”

평소라면 오르가 숫자를 뽑고, 그래프를 정리하고,
내가 말할 문장 구조까지 미리 잡아줬다.

오늘은 내가 직접 엑셀을 열었다.
파일이 어느 폴더에 있는지 잠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검색창에 단어를 쳤다. 비슷한 파일이 여러 개 나왔다.

그 짧은 공백 동안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마침내 파일을 열고 숫자를 찾았다.
“네… 평균 편차는 줄었습니다. 대략 10% 정도.”

말은 나갔다.
그런데 그 말에 ‘내가 지금 잘 대응했다’는 감각이 따라오지 않았다.
칭찬을 받아도, 지적을 받아도 비슷했을 것 같은 텍스처.

회의는 지나갔다.
내가 그 안을 통과한 것인지,
그저 시간이 흘러간 것인지 구분이 느슨했다.



점심시간, 도진이 내 옆에 앉았다.

“선배, 이어셋 없다고 하셨죠?”
도진이 국을 떠먹으며 말했다.
“표정이… 좀 더 조용해 보이네요.”

나는 대답하려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 번 더 생각했다.
생각은 했는데, 정리가 안 됐다.

“그냥… 불편하긴 한데.”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도진이 웃었다.
“불편하죠. 전 하루만 끊겨도 멘탈 나가던데.”

‘멘탈 나간다’는 표현은 과장처럼 들렸지만,
그게 과장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감각도 흐릿했다.

도진이 말을 이었다.
“근데 선배는… 이상하게 괜찮아 보이세요.”

괜찮아 보인다는 말이
칭찬인지, 걱정인지, 비꼼인지 잘 모르겠었다.

“괜찮은 건… 모르겠어.”
나는 입으로 그렇게 말해놓고도,
그 문장이 내 감정을 정확히 가리키는지 확신이 없었다.

도진이 젓가락을 잠깐 멈췄다.
“이어셋 없으면, 오히려 생각이 좀 돌아오지 않아요?”

나는 그 질문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맞는 내부 감각이 없었다.

“생각은…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무난한 쪽으로 대답을 맞췄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매는 조금 풀리지 않았다.



오후 실험 준비는 더 느렸다.

오르가 있을 때는 ‘다음 단계’가 늘 떠 있었다.
지금은 눈앞의 단계만 있었다.

시료 번호를 한 번 잘못 적었다.
장갑 낀 손으로 다시 지우고, 다시 썼다.
실수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실수의 감정은 안 따라왔다.

그게 이상해야 하는데,
이상하다고 느끼는 에너지도 없었다.

‘문제가 없으면 괜찮은 거지.’
그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문장에 동의하거나 반박할 기운이 없었다.



퇴근길,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멈췄다.

평소라면 오르가 문장을 추천했을 것이다.
‘오늘 늦습니다.’
‘저녁 뭐 먹을까요?’
‘지금 출발합니다.’

오늘은 내가 직접 써야 했다.
그런데 ‘무슨 말이 적절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썼다.

[좀 늦어.]

보내고 나서도
그 문장이 무례한지, 필요한지, 부족한지
판단이 붙지 않았다.

아내에게 답장이 왔다.

[알겠어.]

짧은 문장이었는데,
그 문장이 차갑게 느껴지지도, 다정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거실 조명이 켜져 있었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늘 힘들었지?”
아내가 물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정리했다.
힘들었다는 말이 사실이긴 했다.
여러 번 멈칫했고, 여러 번 놓쳤고, 여러 번 늦었다.

그런데 “힘들었다”는 감정이 몸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피로는 있었지만, 피로가 감정으로 번지지 않았다.

“좀 불편하긴 했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내가 나를 한참 보다가 말했다.
“불편했는데… 왜 표정이 없어?”

나는 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
표정이 없다는 지적이 맞는지도, 아닌지도
내 얼굴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멀었다.

“그냥… 그런가 봐.”
나는 말을 고르지 않고 내뱉었다.

아내는 더 말하려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어셋, 내일은 새로 받아?”

“AS 신청해야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해야 한다’는 감각이 약했다.
그저 절차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밤, 서재.

책상 위에 젖었던 이어셋이 놓여 있었다.
겉은 마른 듯했지만, 전원을 눌러도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충전 도크에 올려두었다.
LED가 켜지지 않았다.

리셋을 시도했다.
짧게 누르고, 길게 누르고, 몇 초를 기다렸다.
아무 것도 없었다.

고객센터 앱을 켰다.
인증을 요구했다.

인증 코드는 오르가 관리하던 영역이었다.
평소라면 “지금 확인하시겠습니까?” 같은 안내가 떠야 했는데,
오늘은 내가 직접 입력해야 했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내일 하자.

그 말이 나태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현실적 판단이라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은 더 이상 이어갈 힘이 없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깐 천장을 바라봤다.

하루 종일 고생했다.
실수도 했고, 머뭇거림도 많았고, 타이밍도 놓쳤다.

그런데 그 하루가 “괴로웠다”거나
“속상했다”거나
“짜증났다”는 식으로 마음에 남지 않았다.

고생한 하루였는데,
그 사실에 비해 너무 조용했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

오르가 없어서 힘든 건 맞았다.
그런데 오르가 없어서 내가 돌아온 건 아니었다.

나는 그냥, 더 비어 있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도
오늘 하루를 정리하고 싶다는 욕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는 게 편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냥, 아무 것도 없었다.

눈을 감기 직전,
습관처럼 한쪽 귀가 허전하다는 걸 느꼈다.

그 허전함조차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이 아니라 물리적 사실처럼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내일이 더 나빠질 거라는 불안도 없이.

그저,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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